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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운산 관대봉 너머로 저물던 해가 숨을 거두면, 붉은 노을이 지나간 자리에 가을이 찾아든다.
아침저녁으로 살갗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영롱한 아침의 맑고 서늘한 공기와 눈 부신 햇살을 받으며 푸르던 들판의 벼 이삭은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황금빛으로 변해 간다.
알알이 익어가는 저 대지의 풍요로움은 어느새 눈부신 가을 볕살을 가득 받아 마음까지 풍성하게 채운다.
여름내 뙤약볕 아래서 까맣게 탄 농부의 주름진 얼굴을 마주하면 실바람에 실려 오는 흙 내음 속에서 그의 미소가 환하게 피어난다. 그리고 들판 가득한 풍성함은 지난 계절의 모든 시름을 잊게 만든다.
가을의 결실이 이토록 눈부신 것은 지나온 여름이 유독 가혹했기 때문이리라.
돌이켜보면 지난 6월 말부터 한 달 가까이 이어진 가뭄은 혹독했다. 온종일 습도가 높아 후텁지근한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혔고, 불쾌지수는 치솟았다.
한여름의 강렬한 햇볕 아래 바싹 마른 땅은 입을 벌렸고, 모를 심은 논배미마다 농심도 함께 타들어 갔다. 물길이 닿지 않아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논바닥은 마치 힘겨운 삶의 흔적을 새긴 듯했다.
또한 들판에는 벼를 심은 논에 조금이라도 물을 더 대기 위해 이웃 간의 소리 없는 신경전이 치열하기도 했다.
하루해가 서산을 넘어 자취를 감춰도 땅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지만 한 줄기 시원한 저녁 바람이 불어와 빰을 스치면 비로소 살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낮에는 더위를 피해 냉방이 잘되는 집안이나 도서관을 전전하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저녁을 먹고 마을 앞 들길을 산책하는 것이 어느새 여름날 나만의 저녁 일과가 되었다.
땅거미가 내려앉는 들녘은 한낮의 치열함을 위로하듯 장엄한 모경(暮景)을 선사했다. 하늘은 붉은빛에서 보랏빛으로, 다시 깊은 네이비색으로 번져나가며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또한 세상을 시끄럽게 울리던 매미 소리가 잦아든 자리를 어둠 속 들판에서 풀벌레와 귀뚜라미의 노랫소리가 채우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 팽팽하던 마음의 긴장감도 풀렸다. 비로소 나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여백을 가지는 시간이었다.
치열했던 더위를 견디고 내일을 위해 휴식을 갖게 하는 자연의 배려이기도 했다.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던 찜통더위도 9월의 문턱을 넘어서며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었다. 푸른 융단을 펼쳐놓은 듯 싱그럽던 들판은 이제 완연한 황금색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깊은 밤의 어둠을 지나 새벽의 여명이 빛을 뿌리듯, 저 들판 위로 황금빛 물결이 일렁인다. 무덥고 바빴던 일상을 접고 마음의 여유를 찾고서야 계절의 순환 속에서 흘러가는 세월이 이토록 빠르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지나온 여름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모진 비바람이 몰아쳐도 대지는 묵묵히 숨을 쉬며 제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 품에서도 푸르게 자라난 우리들의 꿈은 영글어가고 있다. 뜨거웠던 여름을 견뎌내고 맛보는 모처럼의 행복한 이 아름다운 계절에 가을 노래 시조 한 수를 읊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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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서
송 홍 주 (남해문학회장)
영롱한 아침 이슬 눈부신 가을볕에
누렇게 고개 숙인 황금 들판 일렁이니
그토록 푸르던 삶도 아름답게 익어가네.
여름내 까맣게 탄 주름진 농부 얼굴
바람결 흙 내음에 환한 미소 피어나고
풍성한 오곡백과에 묵은 시름 잊누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