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여 년 우정으로 다시 떠난 가을 여행
2026년 10월 31일, 병오년 만추의 길목에서 남해에 거주하는 '해성중 27기' 동창들이 거창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지난해 전남 목포에서의 만남에 이어 올해는 선비의 숨결과 아름다운 꽃이 어우러진 거창을 목적지로 정했다.
까까머리와 단발머리로 교정을 누비던 고향 친구들이 졸업한 지 어느덧 오십여 년,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학창 시절의 정겨움과 반가움이 되살아났다.
아침 7시 남면사무소를 출발한 버스는 오리마을과 덕월마을을 거쳐 남해 유배문학관에 도착했다.
밤새 내린 서리가 남아있는 쌀쌀한 아침, 열여섯 명의 동창은 김밥과 콩고물떡 등 먹거리와 정을 가득 싣고, 오전 7시 30분 거창을 향해 출발했다.
남해의 가을 들녘에서 마주한 농심(農心)과 거창 창포원의 꽃물결
차창 밖 남해의 들녘에는 시금치와 마늘이 푸른 생명력을 뽐내야 할 때였지만, 계속된 잦은 비로 누렇게 변한 시금치잎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풍년을 바라며 정성을 쏟은 농부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자연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농촌의 현실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농민들의 시름을 함께 나누며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를 기원했다.
중간 휴식처인 사천휴게소에서는 돼지고기 수육에 소주 한잔을 곁들이며 여정의 흥을 돋웠다. 오랜 친구들과 나누는 담소는 수육만큼이나 구수하고 정겨웠다.
오전 9시 30분, 버스는 거창 창포원에 도착했고, 드넓게 펼쳐진 국화꽃이 우리 일행을 반겼다. 매표소에서 신분증을 확인한 직원은 65세 이상 경로우대 무료입장을 안내했다. 반가운 혜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만감이 교차했다.
한때 청춘을 누리던 우리가 어느새 경로우대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세월의 빠름을 새삼 실감했다.
창포원에서 발견한 남해 정원 도시의 가능성
거창 창포원은 경남도 제1호 지방정원으로, 대한민국 정원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지역의 대표 명소다.
약 13만 평의 수변정원에는 창포를 비롯해 장미와 국화, 연꽃, 들꽃 등 다양한 식물이 어우러져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을 선사한다고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살려 수변 공간을 체계적으로 가꾸고 군민과 관광객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정원문화의 좋은 본보기로 다가왔다.
꽃길을 거닐다 보니 문득 고향 남해의 미래가 떠올랐다. 남해군도 '삶이 꽃피는 정원의 섬, 남해'를 비전으로 천혜의 자연경관과 지역 특색을 살린 정원도시를 구상하고 있다.
남해에는 푸른 산과 보석 같은 바다, 다랑논 들녘과 정겨운 마을이 있다.
여기에 지역 고유의 식물과 향토적 정취를 담은 정원을 조성한다면 남해만의 차별화된 관광 자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꽃을 심는 데 그치지 않고 군민의 일상과 관광객의 발길이 사계절 이어지는 정원을 만들어야 한다.
계절별 테마 정원과 마을의 역사·문화를 담은 이야기 정원을 조성하고, 지역의 기후와 토양, 바닷바람에 적합한 식물을 선정해 지속적인 관리 체계도 갖춰야 한다.
거창 창포원을 그대로 본뜨자는 뜻은 아니다. 공간구성과 계절별 식재, 효율적인 운영 경험을 배우되 남해의 자연환경과 고유한 생활 문화에 맞게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다른 지역의 우수한 사례에서 배우면서도 남해만의 색깔과 정서를 담아낸다면 더욱 의미 있는 정원이 탄생할 것이다. 이번 나들이는 꽃의 아름다움을 넘어 '정원의 섬 남해'가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게 한 뜻깊은 여정이었다.
구연서원(龜淵書院)에서 되새긴 남해의 학문과 충절의 역사
약 두 시간 동안 창포원을 둘러본 뒤 점심 식사를 위해 거창읍의 '보양산 염소 전문점'을 찾았다.
잡내 없이 깊은 풍미가 배어 있는 고기 맛과 깔끔하고 쾌적한 식당 환경, 주인 아주머니의 친절한 응대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태윤 친구가 점심값 전액을 선뜻 부담해 친구들을 감동시켰다.
넉넉한 마음 덕분에 식탁에는 음식만큼이나 우정과 정이 넘쳤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오후 일정으로 거창의 대표 명승지 수승대를 찾았다.
입구에서 마주한 구연서원(龜淵書院)의 고풍스러운 모습은 옛 선비들의 학문과 풍류를 떠올리게 했다. 고즈넉한 경내를 둘러보며 거창이 예로부터 선비와 교육의 고장으로 불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문득 고향 남해의 문화유산도 떠올랐다.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 속에서도 인재 양성의 역할을 해 온 남해향교와 충렬사를 비롯한 무민사·난곡사·율곡사·운곡사·녹동사 등 여섯 사우(祠宇)가 그곳이다. 거창이 구연서원을 교육·문화 자원으로 활용하듯, 남해 역시 향교와 사우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해 관광과 교육·체험 프로그램으로 연계할 필요가 있다.
선조들의 학문과 충절을 오늘날 지역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수승대(搜勝臺)의 바위와 소나무가 일깨운 삶의 지혜
구연서원의 고즈넉한 풍경을 뒤로하고 수승대의 비경을 마주했다.
오랜 세월 풍우에 깎인 거대한 암반과 너럭바위가 맑은 계곡물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바위 곳곳에 새겨진 옛사람들의 이름과 시문(詩文)을 바라보며 후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선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자녀들의 이름까지 새겨 놓은 흔적을 보니 그들은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영원히 남기고 싶었던 이름도 결국 세월 속에 희미한 흔적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때 척박한 암벽 틈에 뿌리를 내린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 줌의 흙도 넉넉하지 않은 바위에서 비바람과 폭설을 견디며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숱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묵묵히 견디다 보면 다시 웃을 날이 찾아온다. 소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삶의 지혜를 새삼 깨달았다.
수승대 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지난해 목포 여행에 이어 올해도 친구들을 위해 커피값을 전액 부담한 정열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모임에서 친근하게 '작은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해마다 변함없는 배려로 친구들을 챙겨 왔다. 커피 한 잔에 담긴 그의 따뜻한 마음은 오십여 년 이어온 우정의 깊이와 나눔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사과 따기 체험에서 찾은 남해 농촌의 새로운 활로
이어 우리 일행은 거창군 북상면 '숲옛마을'로 이동해 사과 따기 체험에 나섰다.
거창의 대표 특산물인 사과를 단순한 농산물 생산에 그치지 않고 도시민과 관광객이 참여하는 농촌 체험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킨 점이 인상적이었다. 과수원에는 붉게 익은 사과가 가을 햇살 아래 보석처럼 빛났다. 사과 봉지를 들고 나무 사이를 거닐며 직접 열매를 고르는 일은 잊고 지냈던 동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더 크고 달콤한 사과를 고르려 신중을 기했지만, 막상 따서 보니 기대와 다른 경우도 있었다.
눈앞의 모습만으로 선택을 확신하지만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알게 되는 삶의 이치와도 닮았다.
그러나 가장 좋은 사과를 고르지 못했더라도 친구들과 함께 수확하며 웃는 순간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했다. 체험을 마치고 사과 한 상자씩을 들고 나니 마음까지 넉넉해졌다.
프로그램을 정성껏 준비한 마을 주민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곳을 둘러보며 남해 농어촌의 발전 가능성도 생각했다.
마늘과 시금치, 유자, 단호박, 바지락 등 지역 특산물을 활용해 수확은 물론 가공과 음식 만들기까지 체험할 수 있는 마을을 조성한다면 농가 소득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농산물 생산에 체험·가공·관광을 결합한 6차 산업으로 발전시켜 농촌 자원을 새로운 부가가치로 연결할 필요가 있다.
노래자랑에서 되살아난 학창 시절과 우정의 기쁨
'숲옛마을'의 사과 따기 체험을 끝으로 거창군에서의 공식 일정을 마친 뒤, 남해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행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학구 대항 노래자랑'이 흥겹게 펼쳐졌다.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 친구들의 거침없는 노래 실력과 재치 있는 입담에 버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노래마다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특히 읍내에서 '정관장'을 운영하는 주철 친구가 대상 경품을 흔쾌히 협찬해 즐거움을 더했다.
함께 노래하고 웃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오십여 년 전 순수했던 중학생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 중요하지만, 오랜 벗들과 만나 추억을 나누고 마음껏 웃는 시간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중한 기쁨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살피며 근심과 시름을 잠시 내려놓는 이 시간이야말로 노년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최고의 보약이 아닐까. 오십여 년의 세월을 함께 건너온 친구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앞으로도 건강하게 이어가고 싶다.
"우리가 남이가!" 고향 상권(商圈)을 살리려는 작은 실천
여행의 마지막 저녁 식사 장소를 정하는 순간, '해성중 27기' 친구들의 고향 사랑이 다시 한번 빛났다.
당초 귀갓길에 하동군 진교면에서 식사할 계획이었으나, 병조 친구가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고향 남해 노량 횟집 상가를 찾아 식사하자는 제안을 내놓았고, 열여섯 명 모두 흔쾌히 뜻을 모았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겨운 한마디에는 오십여 년간 쌓아온 우정과 고향을 아끼는 애향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은 거창한 구호보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과 상인들에게 작은 소비와 실천으로 힘을 보태는 데서 시작된다. 친구들의 자발적인 선택은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애향심의 실천이었다.
고향의 싱싱한 회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해읍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새벽부터 이어진 긴 여정에 몸은 다소 지쳤지만, 마음에는 즐거운 추억과 따뜻한 여운이 가득했다. 여행의 전 일정을 세심하게 기획하고 이동과 식사, 안전한 귀가까지 챙겨준 회장님의 헌신에 감사드린다.
아울러 점심 식사비를 부담한 태윤 친구, 커피값을 후원한 정열 친구, 노래자랑 경품을 협찬한 주철 친구의 나눔까지 더해져 이번 여행은 우정과 배려, 고향 사랑이 어우러진 더욱 뜻깊은 하루로 마무리되었다.
거창(居昌)에서 품은 꿈, 남해(南海)에서 피울 희망의 꽃
이번 병오년 가을 나들이는 거창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고향 남해의 미래를 구상하고, 친구들의 따뜻한 나눔을 통해 우정의 참된 가치를 되새긴 뜻깊은 여행이었다.
창포원에서는 자연과 지역 특색을 살린 정원도시의 가능성을, 구연서원에서는 남해의 향교와 사우(祠宇)가 지닌 역사·문화 자원의 활용 방안을 생각했으며, '숲옛마을'의 사과 따기 체험에서는 농특산물과 관광을 연계한 농어촌 발전의 길을 살펴보았다. 노량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어려움을 겪는 고향 상권에 힘을 보태는 작은 실천의 의미까지 일깨워주었다.
이처럼 다양한 경험은 지역의 미래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자원을 소중히 여기고 이웃과 함께 실천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해성중 27기 동창회의 끈끈한 우정과 연대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어져 새로운 추억을 쌓고, 오십여 년을 함께 걸어온 친구들의 배려와 나눔이 고향 남해의 미래를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 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