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하루아침에 잉태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머물며 오랜 세월을 살아내는 동안, 척박한 땅을 일구는 노동과 땀, 이웃과 나누는 축제, 그리고 시대의 아픔과 상처가 겹겹이 쌓여 마침내 지역의 '얼굴'이 된다.
지난 20일, 남해문화원에서는 이처럼 남해군민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찬찬히 되짚어보고 지역 문화의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제30회 문화의 날 기념행사' 및 김미숙 남해문화원장의 저서 『남해 섬의 시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남해군이 나아가야 할 '문화 자치'의 방향성과 남해의 역사·문화를 학문적 반열로 끌어올리는 '남해학(南海學)'의 토대를 다지는 자리였다.
군민이 주인공이 된 문화 한마당기념식의 포문은 남해문화원 회원들이 직접 꾸민 문화공연으로 열렸다.
한국무용반의 고풍스러운 '사랑무'와 김연우 강사의 열정적인 '진도북춤'은 관객들의 흥을 돋우었고, 시니어 모델반의 스카프 퍼포먼스는 세대를 뛰어넘는 문화 참여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이어 고고장구반의 신명 나는 타악 공연과 남해문화원 색소폰반의 앙상블은 남해문화원이 일상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증명했다.
무대 위에 선 이들은 전문 예술인이 아닌 남해의 이웃들이었으며, 이들의 열정은 '삶 자체가 곧 문화'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날 제4회 경남도민 문화의 달 문화예술 발전 공로자로 선정된 시니어 모델반 김수미 강사의 수상 역시, 지역 문화 보존과 생활 문화 발전에 기여한 군민들의 땀방울을 조명하는 순간이었다.
제30회 문화대상 김동규 교수
이날 행사의 가장 큰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제30회 남해 문화대상 시상식이었다.
영예의 대상은 북한학의 권위자이자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인 김동규 교수에게 돌아갔다.
1939년 남해 설천면 출신인 김동규 교수는 2004년 정년퇴임 직후, 중앙 학계의 부름을 뒤로하고 주저 없이 고향 남해로 낙향했다. 양광용 유배문학관 명예관장은 심사평을 통해 "김 교수는 중앙 무대에서 북한학 권위자로 매일 텔레비전에 나올 수 있는 지위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기향하셨다"며, "이후 20여 년간 독서 모임 '아름다운 사람들'을 창립, 남해의 문화 수준을 크게 선양시켰고, 보물섬 남해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지역 싱크탱크 역할을 자처하셨다"고 그의 헌신을 높이 평가했다.
김동규 교수는 수상 소감에서 "문화는 그 나라가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척도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유해도 문화가 빈약하면 후진국과 다름없다"며 문화의 본질적 가치를 역설했다. 특히 그는 "제가 받은 100만 원의 상금조차 미약하지만 남해 문화 발전을 위한 경비로 다시 희사하겠다"고 밝혀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지역사회의 평생학습과 주민들의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는 데 바친 김 교수의 삶은, 지역의 원로가 어떻게 공동체 문화에 기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귀감이었다.
'정원의 섬 남해', 그 중심에 '문화 콘텐츠'
지자체의 문화 정책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도 이어졌다. 류경완 군수는 축사에서 "민선 8기의 목표인 '정원의 섬'은 단순히 정원을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다양한 문화 활동을 누리며 '휴양의 섬'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드웨어적 공간 조성에 머물지 않고, 그 안을 채울 소프트웨어인 '문화'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정홍찬 의장 역시 "삶을 살아가는 과정 전체가 문화이며, 이를 기록하고 남기는 것이 우리 문화인들의 역할"이라고 화답했다.
특히 앞서 양광용 명예관장이 지적한 "남해는 이순신 장군과 김만중 선생이라는 문(文)과 무(武)의 훌륭한 콘텐츠를 겸비한 대한민국 유일의 향토"라는 대목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정원의 섬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외형적 조경을 넘어, 남해만의 독창적인 역사·인문학적 스토리가 결합된 융복합 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기록이 예술이자 지역의 자산이 되다 김미숙 원장의 『남해 섬의 시간』기념식 후반부는 김미숙 남해문화원장의 저서 『남해 섬의 시간』 출판기념회로 꾸며졌다. 이 책은 남해의 자연, 사람들의 삶, 잊혀가는 풍경과 상처까지 섬세한 기자의 눈과 작가의 문장으로 엮어낸 '남해 기록'이다.
박성석 남해학 연구소장은 서평을 통해 "이 책은 기자의 날카로운 시각, 기록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가적 능력, 그리고 로컬의 일상을 세계의 역사와 연결하는 문화 콘텐츠 전문가의 역량이 빛나는 인문학적 안내서"라고 극찬했다.
눈길을 끈 것은 책의 표지를 장식한 동아대 석좌교수 성각 스님의 선화(禪畵) 작품 기증과, 이윤원 전 재부남해군향우회장의 500만 원 남해학 발전 기금 쾌척이었다. 김미숙 원장 본인 역시 책의 저작권과 판매 수익금 전액을 '남해학 발전 기금'으로 남해문화원에 기부하기로 해, 이 책이 개인의 성취를 넘어 지역 사회의 공공 자산으로 환원되는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
김미숙 원장은 "남해학은 남해의 뿌리를 찾는 일인 동시에 기록으로 남지 않은 사람들의 기억 속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며 "60년 전통의 남해문화원이 남해의 역사와 문화를 찾고 정리해야 할 소명이 크다"고 역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