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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미래신문기획 - 남해, 우리 역사와 문화 재발굴
1861년 『대동지도(大東地志)』 남해에 기록된 해방(海防) 방어와 국방 지리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기록된 남해는 수백 년에 걸친 행정적 재편과
군사 체계의 정비를 통해 조선 후기 남해안 방어를 책임진 국가 안보의 핵심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남해는 풍부한 해양 자원과 체계적인 교통·통신망, 그리고 끊임없는 외침에 맞서 싸운
국토 수호와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한 조선 해방(海防)의 성지였다.

2026. 10.23. 17:07:11

▲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수록된 남해현 기록


본 글은 『대동지지』 「경상도 남해조」의 기록을 중심으로 19세기 조선(朝鮮)이 인식한 남해현의 위상을 다섯 가지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신라(新羅)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 건치연혁(建置沿革)과 그에 따른 행정적 변천 과정을 알아보고, 둘째, 시대적 방어 전략의 변화에 따라 재편된 군사적 시설과 관방(關防) 체계의 추이를 규명하며, 셋째, 영토의 눈과 발이 된 봉수망(烽燧網) 및 목장(牧場), 그리고 육로(陸路)와 수로(水路)를 아우르는 교통·통신망(交通通信網)의 운영 양상을 살펴보고, 넷째, 지리적 한계를 극복한 방면(坊面)의 편제와 다채로운 특산물(土産物)에 얽힌 경제활동을 분석하며. 마지막으로 『대동지지』가 이례적으로 방대하게 기술한 고래(古來)의 전고(典故)를 바탕으로 남해가 지닌 국가 안보적 의의와 영웅들의 자취가 남긴 지역사적(地域史的) 가치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건치연혁(建置沿革)과 행정적 변천 과정


남해(南海)는 지리적으로 고립된 바다 한가운데의 섬이었으나, 삼국시대(三國時代) 이래 남방 해안선(海岸線)을 통제하는 행정(行政) 및 군사적(軍事的) 교두보(橋頭堡)로 성장을 거듭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와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의 고증에 따르면, 남해는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10년(690)에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이라는 독립된 군(郡)의 지위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이후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전국적인 한자 지명 개정(地名改定)이 단행되면서 오늘날까지 사용하는 '남해군(南海郡)'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산하에 난포현(蘭浦縣)과 평산현(平山縣)이라는 두 개의 영현(領縣)을 거느리며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에는 중앙에서 지방관인 현령(縣令)이 파견되는 체제로 전환되면서 행정적 위상은 한층 공고해졌으나, 바다를 접한 변방의 섬이라는 숙명은 외세의 침략에 따른 혹독한 시련을 동반하였다.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7년(1358)에 이르러 왜구(倭寇)의 약탈이 극에 달하자, 고을의 행정 기능과 주민 전체가 섬을 버리고 육지인 진주(晉州) 서쪽 40리 지점의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현재 하동 북천면)'으로 피난하여 더부살이하는 '교우(僑寓)'의 비극을 겪었고, 이는 조선(朝鮮) 초기까지 46년간 이어지며 남해를 사실상 비어 있는 공도(空島)로 만들었다.
조선 왕조(朝鮮王朝) 건국 이후에는 유민(流民)들을 복귀시키고 남방 해안선을 안정시키기 위한 치열한 행정적 실험이 전개되었다.
태종(太宗) 대에는 하동(河東)과 합쳐져 '하남현(河南縣)'으로 불리다가 분리되었고, 진주의 금양 부곡(金陽部曲)을 편입하여 '해양현(海陽縣)'이라 칭하기도 했다.
세종(世宗) 1년(1419)에는 다시 곤명현(昆明縣)과 통합되어 '곤남군(昆南郡)'이 되었다가, 세종 19년(1437)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립된 '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온전히 복구되었다.
연산군(燕山君) 4년(1498)에는 고을 사람과 구례(求禮) 주민 배목인(裵目仁) 등이 모반(謀叛)을 꾀했다는 이유로 현감(縣監)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으나, 중종(中宗) 2년(1507)에 다시 현령 체제를 회복하였다.
이처럼 무수한 통합과 분리, 강등과 복구의 역사는 왜구의 위협 속에서 영토를 방어하고 통치력(統治力)을 유지하려 했던 조정(朝廷)의 처절한 고심의 궤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2) 군사적 시설과 관방(關防) 체계의 변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군사시설 관련 기술은 18세기 중엽의 『해동지도(海東地圖)』와 비교했을 때 매우 중요한 방어 전략의 변화를 담고 있다.
고을의 핵심 방어 기지인 남해읍성(南海邑城)은 둘레 2,876척의 석성(石城)으로, 옹성(甕城) 18개와 우물 하나, 샘 다섯 곳을 갖추어 철저한 수성(守城)이 가능하도록 축성되었다.
특히 김정호(金正浩)는 이 읍성이 세조(世祖) 5년(1459)에 다시 축조된 것임을 명확히 밝혀 고증의 정확성을 높였으며, 읍치 북쪽 17리에는 옛 고현산성(古縣山城)과 관당고성(官堂古城)의 흔적이 남아있어 과거의 방어 중심지가 점차 남쪽으로 이동해 왔음을 증명한다.
수로(水路)를 통한 적의 진입을 원천 차단하는 진보(鎭堡) 체계의 변화 역시 매우 역동적이다. 남해 최동남단의 핵심 거진(巨鎭)인 미조항진(彌助項鎭)은 성종(成宗) 17년(1486)에 처음 설치되었으나 왜구에게 함락당하는 아픔을 겪은 후 혁파되었다가, 중종(中宗) 17년(1522)에 둘레 2,146척의 석성으로 중건되었다.
이곳에는 종3품의 수군첨절제사(水軍僉使)가 파견되어 고을 수령이 겸임하는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와 함께 남해 안보의 쌍두마차를 이루었으며, 서남쪽의 평산포진(平山浦鎭)에는 수군만호(萬戶)가 배치되어 굳건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대동지지』의 중요한 사료적 가치는 과거 존재했던 소규모 보(堡)들의 '혁폐(革廢) 역사'를 정밀하게 기록했다는 점에 있다. 조선 전기에 설치되었던 성현보(城峴堡)와 우현보(牛峴堡)는 중종 17년(1522)에 해안 방어선 강화를 위해 각각 상주포(尙州浦)와 곡포(曲浦)로 이전되어 권관(權管)이 상주하는 요새로 기능하였으나, 영조(英祖) 27년(1751)에 이르러 상주포보와 곡포보가 전격 혁파되는 대대적인 재편을 맞이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주력 전선(戰船) 중심의 기동 타격 체계로 해군 전술이 변화함에 따라 낙후된 소규모 진보를 유지하기보다 미조항진과 평산포진 같은 거점 기지에 군사력을 결집하여 해방(海防)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조선 조정의 전략적 구조조정 결과였으며, 김정호는 이러한 변천사를 낱낱이 기록하여 관방 체계의 추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3) 봉수망, 목장, 교통·통신망의 입체적 운영


조선 후기 남해(南海)는 정보의 전달, 군사 자원의 확보, 그리고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물류의 중심지로서 유기적인 통신·교통망(交通通信網)을 구축·운영하고 있었다.
남해의 봉수(烽燧)는 단순한 경보 시설이 아니라, 전국 봉수 체계 가운데 제5거(第5炬, 전라도 방면)의 신호가 시작되거나 경상도(慶尙道)와 긴밀히 연계되는 '초기(初起)' 봉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남해 봉수망의 핵심 거점인 금산(錦山) 봉수는 최전방 미조항(彌助項)의 '영상별망(嶺上別望)'으로부터 1차 해상 감시 정보를 직접 전달받았으며, 소흘산(所屹山)·원산(猿山) 봉수는 금산에서 발신된 신호를 내륙의 진주(晉州) 각산과 전라도(全羅道) 순천(順天)의 돌산(突山) 봉수로 신속히 전달하여 광범위한 군사 정보를 전파하였다.
이는 남해가 남해안 해상 방어망의 최전선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더불어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이전 지도나 지리지에서 간과하기 쉬운 국영 목장(牧場)의 존재가 뚜렷이 기록되어 있어 국가의 군사 자원 확보 양상을 잘 보여준다.
고을 내에는 금산곶장(錦山串場)과 동천곶장(凍川串場) 등 두 곳의 목장이 운영되었는데,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串) 형태의 지형은 말[馬]의 이탈을 방지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아내기에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였다.
이곳에서 사육된 군마(軍馬)는 북쪽 35리에 위치하여 7필의 역마를 상시 보유한 덕신역(德新驛)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시 상황에서 고을의 군사적 기동력(機動力)을 보장하는 핵심 자원이 되었다.
이와 같은 군사·정보망은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을 잇는 대동맥인 진도(津渡) 체계와 맞물려 물류의 중심축으로 기능하였다.
 남해 북쪽 38리에 위치한 노량진(露梁津)은 하동(河東)·곤양(昆陽)과 직접 연결되는 핵심 나루터로서, 단순한 통행로를 넘어 전라도와 경상도의 수군이 교차하고 국가의 물자가 집산되는 요해처(要害處)였다.
 특히 노량에는 세곡(稅穀)을 임시 보관하고 운송하는 조창(漕倉)이 설치되어 있어, 남해가 조선 후기 남방 해상 물류와 유통의 대동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수록된 남해현 기록


4) 방면(坊面) 편제와 토산(土産)의 경제학
 

 1861년 당시 남해(南海)의 행정구역 편제와 경제활동은 자연 지리적 조건에 철저히 순응하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방면(坊面) 기록에 따르면, 고을 관아(官衙)가 위치한 현내면(縣內面)을 중심으로 이동면(二東面), 삼동면(三東面), 남면(南面), 서면(西面), 고현면(古縣面), 설천면(雪川面) 등 7개 면의 경계와 거리가 리(里) 단위로 명확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특히 삼동면은 고을 치소(治所)로부터 최장 90리에 이르는 원거리 지역까지 관할하였는데, 이는 남해 동남부의 험준한 해안 지대와 부속 도서(島嶼)까지도 중앙의 행정력 아래 체계적으로 편입·관리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고을의 토산물(土産) 기록은 남해가 지닌 뛰어난 경제적 가치와 조정(朝廷)에 바치던 진상품(進上品)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섬이라는 지형적 특성상 농지(農地)는 부족했으나, 산과 바다에서 채취되는 물산은 풍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나무, 닥나무, 옻, 비자, 활의 재료인 뽕나무 등 임산 및 수공업 원료를 비롯하여 유자, 석류, 치자 같은 고급 과실과 송이버섯, 표고버섯, 미역, 김 등이 널리 생산되었다.
 특히 김정호(金正浩)는 남해의 어물(魚物)을 기록하면서 '인근 곤양(昆陽)의 토산과 같다'라고 주석을 달아 전복, 해삼, 문어, 낙지, 대구, 홍어 등 총 19종의 다채로운 해산물이 남해 전역에서 대량으로 포획되고 있었음을 고증학적으로 기록했다.
 이 중 대나무와 닥나무, 옻, 뽕나무 등은 군사 무기와 공문서용 종이, 전선(戰船)의 방수용 옻칠에 필수적인 전략 물자였으며, 관아는 내부의 읍창(邑倉) 외에도 동남쪽 30리 지점에 외창(外倉, 곡포)을 별도로 운영하여 이처럼 풍부한 물산과 세곡(稅穀)을 체계적으로 수납·관리하며 지역 경제의 거점을 구축하였다.



5) 역사적 전고(典故)를 통해 본 국가 안보적 의의와 가치
 

 『대동지지(大東地志)』 경상도 남해(南海) 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방대한 전고(典故) 기술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남해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보여주는 핵심 대목이다.
 김정호는 다른 고을에 비해 이례적일 정도로 지면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여 고려(高麗)시대부터 조선(朝鮮) 후기까지 남해 바다에서 펼쳐진 외세와의 혈전을 대서사시처럼 기록하였다.
 고려시대의 항쟁으로는 원종(元宗) 12년(1271) 삼별초(三別抄)의 장수 유존혁(劉存奕)이 남해를 근거지로 삼아 80여 척의 함선으로 해상을 통제하며 대몽항쟁(對蒙抗爭)을 전개한 사실과, 우왕(禑王) 8년(1382)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 장군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의 대선단을 격파하고 바다를 시체로 덮어버린 '관음포 대첩'의 통쾌한 승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혈전은 남해가 지닌 국방사(國防史)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선조(宣祖) 25년(1592) 전란 초기, 원균(元均)이 전선을 침몰시키고 낙담하고 있을 때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은 "이곳은 양호(兩湖, 충청·전라도)의 인후(咽喉)이니, 이곳이 뚫리면 국방이 위태롭다."라고 외치며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는 남해 앞바다가 한반도 전체의 명운을 좌우하는 전략적 요해처(要害處)이자, 국가 안보의 핵심 관문으로 인식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조선 수군의 연합 작전을 가능하게 하였고, 나아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해양 방어 체제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전고(戰古)의 대미는 선조 31년(1598) 음력 11월, 왜장(倭將)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대규모 함대와 맞서 벌어진 노량해전(露梁海戰)과 충무공(忠武公)의 마지막 순국(殉國)으로 장식된다.
 사료는 조·명(朝·明) 연합군을 이끈 명(明)나라의 노장 등자룡(鄧子龍) 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사실과, 관음포(觀音浦)에서 적탄에 맞고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遺言)을 남긴 채 끝까지 북을 울려 군사들을 고무(鼓舞)하며 900여 급(級)을 참획(斬獲)하고 마침내 승리를 이끈 충무공 이순신의 숭고한 서사를 긴밀하게 전하고 있다.
 이처럼 피로써 쟁취한 승전의 현장은 인조(仁祖) 11년(1633)에 창건되고 현종(顯宗) 4년(1663)에 사액(賜額)된 충렬사(忠烈祠)와 그 앞에 우뚝 선 승첩비(勝捷碑)를 통해 19세기 말까지도 고스란히 계승되었으며, 남해 고을의 영예로운 역사적(歷史的) 위상을 더욱 빛내고 있다.



6) 국방의 성지이자 역동적 지역사의 요람, 남해의 역사적 위상
 

 결론적으로, 1861년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기록된 경상도 남해(南海)의 모습은 단순한 남방의 척박한 섬이 아니라, 수백 년간 축적된 국방의 지혜와 영웅들의 투혼이 녹아있는 '조선 해방(海防)의 보루'이자 핵심 요충지였다. 김정호(金正浩)는 세조(世祖) 대의 읍성(邑城) 재축조부터 영조(英祖) 대의 진보(鎭堡) 재편으로 이어지는 군사적 효율화 과정을 정밀하게 고증했으며, 목장(牧場)과 조창(漕倉), 방대한 물산(物産)의 기록을 통해 이 요새를 지탱한 경제적 자생력을 입증하였다.
 무엇보다 전고(典故) 조에 나타난 처절한 항쟁의 기록은 남해의 민초들과 군사들이 굳건히 바다를 지켜냈기에 비로소 조선의 안위와 양호(兩湖)의 풍요가 유지될 수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대동지지(大東地志)』가 전하는 남해의 인문 지리적 자산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국토 수호의 대명제 아래 민관(民官)이 어떻게 결속하고 헌신했는지를 증명하는 생생한 기록이다.
 척박한 지형과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행정과 방어체계를 끊임없이 쇄신하고, 바다와 산의 다채로운 풍요를 일구어낸 고을 주민들의 삶은 그 자체로 역동적인 역사였다. 따라서 『대동지지(大東地志)』 속 남해는 국토의 외딴 끝자락이 아니라, 국방의 최전선에서 국가를 구원한 거룩한 성지(聖地)이자 오늘날까지 그 역사적 온기와 충의(忠義)의 정신이 생생히 살아 숨 쉬는 귀중한 지역사적 가치의 요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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