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시행된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의 최소 성취를 보장하겠다며 '최소성취수준보장제(이하, 최성보)'를 도입했다. 그러나 시행 첫해부터 현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성취율 40%를 넘지 못하면 미이수 처리되어 보충 지도를 받아야 하지만, 학교 여건상 제대로 운영하기 어렵고 학부모 민원까지 겹치면서 교사들은 극심한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문제는 제도의 취지와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교육부는 학생 한 명도 낙오시키지 않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 교사들은 "미이수 학생이 나오지 않도록 시험문제를 쉽게 낼 수밖에 없다"라고 하소연한다. 시험 난이도 조정이 교사의 가장 큰 스트레스로 떠오른 상황, 결국 성취 보장이란 이름 아래 교육의 하향 평준화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교육부는 이 문제를 해결한다며 또다시 땜질식 처방을 꺼내 들었다. 학생·학부모·전문가로 구성된 고교학점제 자문위원회를 열어 성취율 조항을 삭제하고 출석률만으로 이수를 인정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이다. 실제로 자문위원 3분의 2가량이 성취율 삭제에 동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문제해결이 아니라 사실상 제도 포기 선언에 가깝다. 교육부가 처음 내세운 '최소 성취 보장'이라는 취지는 스스로 무력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더 심각한 것은 교육부가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냐는 점이다. 학부모 민원에 위축된 교사들이 학습 부진 학생을 지도하기보다 쉬운 시험을 내는 방식으로 대응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현장 지원이나 학습 부진 학생을 위한 전문 교사 배치 같은 근본 대책은 외면한 채 제도만 도입했다. 그리고 혼란이 커지자, 이제 와서 성취율을 없애자는 방안으로 물러서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정책 설계의 실패다.
교육부가 반복하는 오류는 뚜렷하다. 현장의 교사와 학생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고, 단기적 성과에 매달려 제도를 급하게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그 결과, 교실에서는 학습 부진 학생들이 오히려 낙인효과에 시달리며 학교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일부 학부모는 "우리 아이가 미이수 낙인을 받았다"라며 불만을 제기하고, 교사들은 학습 지도를 시도하기보다 민원 대응에 신경 쓰게 된다. 학생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오히려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최성보는 고등학교에서 갑자기 나타난 문제가 아니다. 학업성취율이 낮은 학생들은 이미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기초 학습 결손을 해소하지 못한 채 진급해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등학교 단계에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이 방치되고, '일단 진급'이라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결국 고등학교에 와서야 성취 보장을 논해야 하는 기형적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오래전부터 학습 부진 학생을 위한 체계적 지원을 제도화했다. 특수교사가 별도 교실에서 학생들의 학습 결손을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담임교사와 과목 교사의 자율적 노력에 의존할 뿐이다. 학습 부진 지도 교사를 제도적으로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없이 나왔지만, 교육부는 늘 예산 문제를 핑계로 외면해 왔다. 그 결과 교실 안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고통을 감수한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서울시교육청교육연구원이 발간한 『배움의 나눔, 행복한 수업』에는 초등학교 2학년 수학 수업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문제는 "길동이가 500원짜리 공책을 사고, 350원짜리 연필을 사니 150원이 남았다. 처음 가진 돈은 얼마인가?"였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 A와 기초학력 부진 학생 B가 짝을 이루어 문제를 풀었는데, A는 쉽게 답을 구했지만, B는 500+350조차 계산하지 못했다. B는 점점 표정이 굳어가며 입을 다물었다. 결국 교사의 개입으로 상황이 수습되었지만, 기초학력 부진 학생이 문제해결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학급 운영의 어려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는 단순한 계산이지만, 기초학력 미달 학생에게는 커다란 장벽이 된다. 교실 안에서 이런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보더라도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국어 10% 내외, 수학 13% 내외, 영어 7% 내외다. 수만 명의 학생들이 이미 기초 학습에서 좌절을 겪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등학교 단계에서 성취 보장을 논하는 것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에 불과하다. 교육부가 진정으로 '최소 성취 보장'을 원한다면,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학습 결손을 조기에 발견하고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럼에도 교육부는 여전히 시험 난이도 조정이나 출석률 기준 같은 피상적 논의에만 매달리고 있다. 교사들의 고충, 학생들의 좌절, 학부모의 불안이 쌓여가는데도 교육부는 근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제도의 껍데기만 손질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고교학점제는 '성취 보장'은커녕 교육 신뢰를 더욱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
특히 교육부의 가장 큰 문제는 책임 회피다. 제도를 만들고 혼란이 생기면 '현장의 적응 부족'으로 돌리고, 개선 요구가 나오면 기준을 낮추거나 삭제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그 과정에서 교사는 '무능한 시험 출제자'로 낙인찍히고, 학생은 '성취율 미달자'로 상처받으며, 학부모는 '제도의 피해자'로 불안만 키워간다. 교육부만 책임을 비켜 가는 구조가 굳어진 것이다. 더 이상 이런 악순환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최성보 논란은 단순히 제도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부가 얼마나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근본적 대책보다 눈앞의 성과에 집착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제는 땜질식 처방을 멈추고, 기초학력 보장을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책임 있게 추진해야 한다. 학습 부진 학생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전문 교사를 배치하고, 학부모 민원에 휘둘리지 않는 공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그것이야말로 고교학점제를 온전히 작동하게 하고, 공교육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교육부는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