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아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 신라의 유학자 빙월당(氷月堂) 설총은 단순한 학자를 넘어, 세속의 언어와 철학, 그리고 백성의 삶을 아우르는 문자 체계를 정비하고 교육의 본질을 탐구한 인물이다. 그의 아호(雅號)인 '빙월당(氷月堂)'은 그의 청명한 인격과 깊은 사유를 상징하는 후대의 문학적 별칭이며, 그의 시호(諡號)는 '홍유후(弘儒侯)'이다.
설총은 아버지 원효(元曉)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로도 유명하다. 원효가 불교의 대중화와 화쟁사상(和諍思想)을 통해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라는 통합적 사유를 강조했다면, 설총은 현실 속에서 지식과 언어가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출가(出家)하지 않고 관직에 진출하여, 유학과 한문학을 바탕으로 국가 질서와 백성의 삶을 연결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신라의 정치·사회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교육과 교양의 중요성을 강조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신라(新羅)는 당(唐)나라와의 활발한 외교·문화 교류 속에서 682년 신문왕 2년에 국학(國學)이 설립되어 유교 교육이 제도화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한자(漢字)는 귀족 중심의 지배 언어였고, 백성(百姓)들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도 글로 표현하거나 기록하는 데 큰 제약이 있었다. 이때 설총은 이두(吏讀)를 정비해 한자의 음과 뜻을 빌리되, 우리말 어순과 문법에 맞게 변형한 독특한 문자 체계를 완성했다.
이두는 이미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존재했으나, 설총은 이를 체계화하고 교육에 활용함으로써 지식과 정보가 특정 계층에 머물지 않도록 했다. 이는 단순한 편의적 수단이 아니라, 교육 개혁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설총의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 교육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교육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교육이 수단인가, 목적인가?' 그는 백성을 위한 문자 체계를 정비했다. 오늘날 교육이 오히려 소외를 낳는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설총은 단순한 언어학자가 아니라 '신라 3문장(三文章, 최치원·강수·설총)' 중 한 사람으로 꼽히며, 뛰어난 문장력과 사상으로 당대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화왕계(花王戒)」는 그의 교육 철학을 압축한 작품이다. 이 우화는 '꽃 나라를 다스리는 화왕(花王) 모란이 자신을 찾으러 온 많은 꽃 중 처음에는 장미를 사랑하다가, 뒤이어 나타난 할미꽃의 충직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려 결국 할미꽃의 진실된 충언에 감동하여 정직한 도리를 숭상하게 된다'라는 내용이다.
「화왕계」는 단순히 신문왕에게 올린 우화가 아니다. 설총은 이를 통해 권력의 절제와 지혜로운 통치를 간접적으로 요구했다. 권력자에게 필요한 도덕적 책무와 정치적 책임의 무게를 상기시키며, 정치적 균형과 백성의 고통에 대한 이해, 그리고 정의로운 정치를 강조한 것이다. 귀족 중심의 정치 질서 속에서 그의 접근은 지식인의 신중한 개입이자, 교육자의 고뇌를 담은 상징적 표현이었다. 이는 정치적 혼란과 부패를 경계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설총은 한림(翰林)의 벼슬에 올라 교육과 문장으로 신라 조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 고려 현종(顯宗, 재위 1010~1031) 때 문묘 18현(文廟十八賢) 중 한 명으로 추존되었다. 이는 유교를 국시로 삼은 고려와 조선에서 '설총 = 동방 유학의 선구자'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공자(孔子)의 사당에 배향된다는 것은 단순한 학문적 성취를 넘어, 삶으로 학문을 실천한 자에게 주어지는 명예이며, 그의 업적이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중요한 상징이다. 그는 교육적 업적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리와 사회적 책임을 중시했으며, 그의 가르침은 세속을 넘어선 도덕적 이정표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신라의 국교는 여전히 불교였고, 유교는 정치적·교육적 이념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 있었다. 이두(吏讀) 역시 일부 귀족 사회에서 '속된 글'로 폄하되는 측면이 있었으나, 설총은 이를 체계화하여 교육에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학문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도 그는 신념을 잃지 않았고 교육의 본질을 붙들었다. 그는 당시 처한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학문으로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 교육자였다.
오늘날 우리 교육은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방향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수단은 넘쳐나지만, '왜 배우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1,300년 전 언어로 백성과 소통하려 했던 설총의 발자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디지털과 인공지능(AI) 시대의 아이들은 한자도 이두도 아닌 새로운 차원의 언어로 세상과 소통한다. 그러나 설총이 추구한 것은 문자나 언어의 형태가 아니라, 그 기능과 목적이었다. 문자를 통해 이해하고 소통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 그것이 바로 교육이었다. 그는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것은 기술이나 형식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진정한 소통'의 방식임을 일깨워 주었다.
교육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이해의 기술'이다. 설총은 이를 실천하며 이두라는 도구로 세상의 문을 백성(百姓)에게 열어주고자 했다. 그의 삶은 유장(悠長)하지만 조용했고, 세속적 성공보다는 의미 있는 전환을 택했다. 교육의 본질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풀어내어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깨달음을 선사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그를 바라보며 묻는다. '교육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설총은 말없이 답한다. 교육은 이해이며, 이해는 곧 자유다. 문자는 그 자유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뿐이다. 오늘날 교육 역시 이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