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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이 묻는 공부의 본질,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 퇴계 이황의 공부와 교육은 지식 축적이 아니라
'자기 성찰과 인격 수양'을 통해 삶의 방향을 찾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 오늘날 교육이 성적·입시 중심에서 벗어나, 퇴계가 강조한
'인간다움·성찰·전인적 성장'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2025. 12.19. 10:28:02

최 성 기 前) 남해해성고·창선고 교장

<!--☞★★★★★★★★★★☞ [ 본문:1 ] ☜★★★★★★★★★★☜//-->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조선 중기의 유학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답을 건넨다. 그는 성리학(性理學)의 체계 안에서 배움의 본질을 성찰하고, 삶의 방향을 스스로 묻는 교육을 실천한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다. 그의 학문은 추상적(抽象的) 관념에 머무르지 않았다. 벼슬과 학문,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참된 앎'과 '도덕적 실천'을 지향했다.



그에게 공부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마음을 닦아 인격을 완성해 가는 여정이었다. 그는 '성찰'과 '수양'을 통해 인간 내면의 도덕성을 길러야 하며, 그 덕성을 일상 속 실천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배움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라는 그의 신념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퇴계는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경계하며, 학문이 삶으로부터 유리되지 않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되돌아보았다. 그의 공부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퇴계 이황은 150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으며, 1534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다. 하지만 권력보다는 학문과 교육에 뜻을 두었다. 관직 생활의 고뇌 끝에 여러 차례 낙향해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제자들과 생활하며 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일방적인 강의보다 '질문과 토론'을 중시했고, 성리학의 핵심인 '궁리(窮理)'와 '존양(存養)'을 공부의 중심에 두었다. 궁리는 사물에 내재한 이치를 깊이 탐구하는 과정이며, 존양은 본래의 성품을 보존하고 길러 나가는 도덕적 수양이다. 그는 이 두 과정을 통해 '앎과 삶'이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제자들에게 외형적인 지식보다 내면의 성숙과 인격 수양을 우선하라고 가르쳤다.



"학문은 곧 마음을 닦는 일이자, 사람됨을 이루는 길이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깊이 공명(共鳴)한다. 퇴계는 결과보다 학습 과정을 중시했으며, 학생 개개인의 성품과 고민을 세심히 살폈다. 그는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 삶의 자세를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였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 교육의 '전인적 성장', '학습자 중심 수업', '삶과 연계된 교육'과 맞닿아 있다.



물론 퇴계의 교육관에는 한계도 있었다. 그의 교육은 신분제 사회 속에서 형성되었기에 여성과 평민을 포괄하지 못했다. 교육은 주로 양반 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지식은 지배 계층의 교양과 도덕 수양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이는 퇴계(退溪) 개인의 한계라기보다, 성리학적 질서와 당대 사회 구조의 제약이었다. 또한 성리학은 인간을 일정한 도덕적 이상형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어, 개인의 개성과 삶의 다양성을 충분히 포용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퇴계의 교육 철학은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모두를 위한 교육'이나 '다양성 존중'의 가치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가 강조한 '자기 성찰에 기초한 배움'은 오늘날의 '질문하는 학습자', '답을 찾아가는 교육'이라는 현대 교육 담론과 깊이 연결된다. 그는 지식의 축적보다 삶의 성찰과 인격의 함양에 중점을 두었고, 이는 오늘날 교육이 지향하는 전인적 성장과 내면적 동기, 주체적 학습자의 형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퇴계의 교육관은 비록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오늘날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오늘날 교육은 여전히 '입시와 성적' 위주다. 문제 해결 능력은 높아졌지만 '왜 배우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부족하다. 디지털과 AI가 빠르게 세상을 바꾸는 시대,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인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 이 점에서 퇴계의 사유는 의미가 있다. 그는 배움을 자기 성찰과 인격 수양의 과정으로 보고, 교육의 본질을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두었다. '자기 수양'과 '타인에 대한 배려'는 공동체 속 인간관계의 성장 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배우고 실천한 동료였다. 이는 현대의 '관계 중심 교육'과 '배움의 공동체'와 맞닿아 있다. 학생 간 협력과 교사와의 신뢰, 사회적 감수성 함양은 미래의 역량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퇴계가 삶으로 보여준 교육 태도는 오늘의 교육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퇴계는 "학문은 부끄러움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라고 했다. 이는 『논어』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곧 용기에 가깝다(知恥近乎勇, 지치근호용)"라는 말과 통한다. 오늘날 말로 풀면, "자기의 부끄러움을 모르면 아무리 배워도 참된 앎이라 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성찰과 도덕 감수성 없는 공부는 결국 공허하다. 성과 중심 교육에 익숙할수록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공부가 절실하다. 퇴계는 그런 공부를 통해 인간이 사회 속에서 성숙한 존재로 자라야 한다고 보았다. 학교는 지식 전달을 넘어 인격을 기르는 공간이며, 출발점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참된 배움은 성찰에서 시작돼 경쟁이 아닌 성장으로 이어진다. 교육은 결국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를 묻는 여정이다.



인공지능(AI)의 발전과 물질적 풍요가 공존하는 오늘, 우리는 교육의 본래 목적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퇴계 이황은 외적 성공보다 내면의 성찰을 중시하며, 교육은 곧 '사람이 되는 일'이라 보았다. 배움은 단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다. 이것이 그의 학문과 삶이 오늘날까지도 의미 있는 이유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학생을 이해하기보다 평가하고 선발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진정한 교육은 성적이나 순위를 넘어, 한 사람의 삶과 마음을 존중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퇴계가 강조한 '존심양성(存心養性,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른다)'은 오늘날의 교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교육적 지침이 된다.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으며,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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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들의 삶에서 배우는

최성기 선생의 교육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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