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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기 선생의 교육이야기] 박세채 교육철학, '외울 것인가보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박세채는 지식 전달을 넘어,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유와 회의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찾는 것이 교육의 진정한 본질임을 보여준다.
그가 고수한 학문적 포용성과 실천적 교육은, 정답만을 강요하는 오늘날 교육시스템에 비판적 사고와 성찰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2026. 04.10. 16:27:48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며 정통의 기록이지만, 진정한 교육적 질문은 종종 그 경계 바깥에서부터 시작된다. 조선 후기의 학자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1~1695)는 시대의 변방에 있었으나 결코 주변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도학(道學)의 권위에 도전하며 사상의 다양성을 추구했던 인물로,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고민하는 '교육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한다.



박세채(朴世采)는 1631년(인조 9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병자호란(丙子胡亂), 효종 복위 운동, 예송논쟁 등 격동의 정치 상황을 몸소 겪었다. 그는 초기에는 서인 계열의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교유하였으나, 도학의 폐쇄성과 당쟁적 성격에 점차 회의를 품고 독자적인 학문 노선을 걸었다. 특히 당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린 일부 인물들과도 학문적 교류를 시도하며 성리학의 엄격한 틀을 넘어, 다양한 사유를 추구하였다.



역사, 문학, 병학, 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 폭넓은 관심을 가졌던 박세채는 「범학전편(範學全編)」을 비롯해 7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다. 또한 논어·맹자의 찬요와 여러 유현(儒賢)의 사우(祠宇) 연원에 관한 기록도 후대에 전했다. 그는 단순히 경학에만 머무르지 않고 백성과 삶을 깊이 이해하고자 역사에 몰두했다. 그의 교육관은 단지 정통을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인식하며 더 나은 삶을 모색하는 실천적 수단이었다.



정쟁의 한복판에서도 박세채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예송논쟁(禮訟論爭) 때 예의 실천 방식과 왕실 위계 문제를 두고 송시열 등과 의견을 달리하며, 논쟁에 뛰어들었고, 이로 인해 여러 차례 파직과 유배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유배지에서도 학문과 교육을 이어갔다. 양근, 지평, 원주, 금곡 등 여러 유배지에서 백성들과 글을 나누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교육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권위주의적 학문 질서에서는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진 그의 사유는 오히려 조선 교육 정신의 확장에 이바지했다.



당대 주류 학계로부터 외면받았던 박세채는 1796년, 그의 학문과 인격을 높이 평가한 정조에 의해 '문묘(文廟) 18현(賢)'에 추존되었다. 조선 성리학 전통의 최고 예우인 문묘 종사는 단순한 명예를 넘어 시대와 사상을 포용한 상징이었으며, 이를 통해 박세채는 조선 교육사에서 정당한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의 삶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여러 번의 파직(罷職)과 유배(流配), 동료들과의 갈등과 외면 속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고 교육을 멈추지 않았다. 성균관 대사성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으나, 그는 권력보다 가르침을 택했고 명예보다 진실을 좇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엇을 외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였다. 제자의 눈빛 하나에도 길을 묻고, 후학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글을 고쳤다. 배움은 그에게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이 점에서 박세채는 오늘날 교육 현장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현재 학교는 얼마나 다양한 관점과 사고(思考)를 포용하는가?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는 교육과정 내에서 실질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가? 그는 체제의 가장자리에 서서 오히려 중심보다 더 정직하게 교육의 본질을 지키려 했다. 정답을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사유(思惟)하는 힘을 기르는 교육, 그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그는 지식의 전달을 넘어, 인간을 기르는 참된 배움의 길을 모색했다. 오늘날 교육이 다시금 그의 뜻을 새겨야 하는 이유다.



박세채(朴世采)의 생애는 단순한 개인의 일대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교육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한 시대의 응답이다. 그의 불편한 존재감은 조선 사대부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 학문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고, 후대 교육에 대한 희망이었다. 박세채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교육이란, 익숙한 질서의 불편함을 감내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는 체제 안에서 길을 잃지 않으면서도 체제 밖 진실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학인(學人)이었다. 그의 삶은 질문하는 용기야말로 교육의 시작임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는 흔히 교육을 안정된 시스템과 계획된 수단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교육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과 마주하고 경계를 넘으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일이다. 박세채는 그런 교육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걸어간 인물이다. 그의 호 '현석(玄石)'처럼, '어두운 속에서도 단단한 바위'와 같이 그는 격랑의 조선에서 흔들림 없이 질문하고 가르쳤다. 제도와 관습의 한계를 넘어, 참된 배움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교육은 결국 멈추지 않는 사유와 실천의 여정이다.



오늘날 교실은 여전히 정답 중심의 질서에 갇혀 있다. 다양한 관점과 질문이 허용되는 교육 환경이 절실한 지금, 박세채의 삶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환기시키는 살아 있는 역사다. 그는 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학문과 교육의 본질을 지키며, 제자들과 함께 사유하고 토론하며 지식을 넘어, 진리를 추구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러한 교육적 용기와 통찰이 필요하다. 교육은 체제를 유지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유를 확장하고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박세채는 교육의 길을 끝까지 꺾지 않고 걸어간 인물이다. 그는 당대 권력의 중심에서는 외면받았으나, 오늘날 교육사에서는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며, 우리는 그에 응답해야 한다. 교육은 그렇게 시대를 넘어 살아남는다. 혼란한 시대에서도 박세채는 학문과 교육 본질을 지키며 권력이 아닌 진리를 따랐다. 그의 사유와 실천은 오늘날의 교육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다. 참된 배움을 되새길 때, 교육은 지식을 넘어, 인간과 사회를 성찰하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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