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사람에게 내린 천재는 시류(時流)를 견딜 수 없다." 시대보다 앞서간 인물은 종종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조선 초기의 비범한 학자이자 문인이었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은 그러한 경계인의 삶을 온몸으로 살아낸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그는 세 살에 글을 읽고 다섯 살에 시를 지었으며, 여덟 살에는 세종의 부름을 받을 정도로 총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조선이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정립해 가던 시대, 그 흐름과는 다른 방향의 사유와 삶을 선택했다.
김시습의 삶은 단순한 일탈이 아닌, 체제와 인간, 지식과 교육의 본질을 끊임없이 되묻는 깊은 사유의 여정이었다. 불의(不義)에 저항하며 절의(節義)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태도는, 시대가 요구한 침묵 대신 고독한 언어로 진실을 써 내려간 한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1455년, 세조의 왕위 찬탈(단종 폐위)은 그의 삶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왔다.
정통성을 부정한 권력 앞에서 그는 벼슬길을 거부하고 세속으로부터 물러났다. 이 선택은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유학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충의(忠義)의 가치를 실천한 도덕적 결단이었다. 이후 그는 '생육신(生六臣)'으로 불리기도 하며, 전국을 떠돌며 절과 암자, 산속 거처에 머물렀다. 그의 방랑은 체념이 아닌 사유의 방식이었다. 자신을 단련하고, 세상을 관찰하며, 지식을 삶 속에서 검증해 가는 지속적인 수행의 길이었다.
이러한 방랑 속에서 탄생한 대표작이 바로 『금오신화(金鰲新話)』이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대표적인 한문 소설로 꼽히는 이 작품은 단순한 환상이나 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억압된 욕망과 도덕의 경계, 운명에 관한 질문이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서사 속에 날카롭게 드러나 있다. 김시습은 당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도전하는 동시에,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고자 했다. 현실을 환상으로 전복시킨 그의 글쓰기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모순을 더 깊이 파헤치기 위한 문학적 장치였다. 그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당대 질서에 균열을 내는 상상력으로 독자에게 낯설고 깊은 사유를 촉발시켰다.
그의 학문적 실천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장소는 경주 남산의 금오산실(金鰲山室)이다. 문헌에 따르면, 이곳은 단순한 은둔처가 아니라, 고요한 사유의 실험실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글을 쓰고, 때때로 사람을 만나 묻고 답하던 그 공간은 김시습의 교육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방에는 '강의(講義)'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지만, 그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일방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누군가 질문하면 이에 성실히 답했을 뿐이다. 앎은 가르침보다 대화 속에서 피어난다는 그의 철학은, 오늘날 교육에서 강조되는 '질문 중심 수업'이나 '학생 주도 학습'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또한 김시습의 교육관은 당시 조선의 획일적이고 위계적인 교육 체계와는 구별되는 면모를 지녔다. 그는 경전 암송에 치우친 성리학적 교육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의 모순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제기하며 교육의 본질을 성찰했다. 글쓰기와 토론을 통해 사유를 확장하고, 자연 속에서 배움을 실천함으로써 지식과 삶의 통합을 지향했다. 그는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교사가 아니라, 삶과 질문을 함께 탐구하는 동반자가 되고자 했다.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창의 융합 교육'이나 '자기주도 학습'의 뿌리를 15세기 그의 교육 실천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유는 문학을 넘어, 권력 비판에도 미쳤다. 그는 세조의 측근이자 권력의 핵심이었던 한명회(韓明澮)를 통렬히 풍자했다. 조선 전기 권세를 휘두르며 정적을 제거한 한명회는 비판의 대상이었고, 김시습은 외면하지 않았다. 『매월당집』에 실린 시문과 평문에서 그는 한명회의 위선을 날카롭게 꼬집고, 권력에 굴복한 문장의 현실을 탄식했다. 전승에 따르면, 압구정(狎鷗亭) 벽에 쓰인 "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젊어서는 사직을 위해 몸을 바치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워 쉬노라.)"라는 글귀를 "청춘위사직 백수오강호(靑春危社稷 白首汚江湖, 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는구나.)"로 두 글자 고쳐 썼다고 한다. 이는 특정 인물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지식과 권력의 유착에 대한 성찰이자 저항이었다. 그는 권세에 아부하며 침묵하는 지식인을 더 위험한 존재로 여겼고, 그의 문필 속 '광기'는 그런 현실을 향한 절박한 진실의 외침이었다.
불교에 귀의했지만, 교리에 갇히지 않았고, 유학자로서도 성리학의 틀에 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고정된 질서에 가두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사유의 지평을 넓혔다. 47세경 두 번째 혼인을 선택한 일도 단순한 세속의 회귀가 아니라, 삶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한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삶은 고정된 틀을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는 탈경계(脫境界)의 여정이자, 자유로운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었다.
그의 생애는 출세와 성공, 성과로 환산되는 교육의 외형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교육(敎育)이란 본디 '삶을 위한 학문'이어야 하며, 질문과 성찰을 통해 인간을 깊이 있게 성장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 김시습(金時習)은 제도 밖에서 그것을 온전히 실천한 인물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이 '점수와 등수', '진로와 스펙'으로 학생을 규정하는 현실 속에서, 그의 삶은 교육의 본질을 다시 묻는 거울이 된다.
그는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문인이었다. 그의 방랑은 회피가 아닌 사유의 행위였고, 그의 절규는 체제에 맞선 진심이었다. 교육은 단순히 앎을 전달하는 체계가 아니라, 삶을 이해하고 구성해 가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김시습은 위대한 문인을 넘어, 오늘날 교육이 길어 올려야 할 사유의 원천이다. 지금, 매월당(梅月堂)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오늘의 교육은 과연 어떤 인간을 길러내고 있는가?" 그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 물음에 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