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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인 기고] 산불 대재앙의 교훈과 공동체 라디오의 역할

2025. 03.28. 11:29:04

▲ 산불 참사가 드러낸 재난 대응의 한계

사상 최악 수준의 산불 참사가 전국을 휩쓸며 우리는 재난 대응 체계의 허점을 절감하고 있다.
이번 산불은 엿새째 이어지는 동시다발적 화재로 역사상 손꼽히는 자연재해가 되었다. 26일 현재까지 최소 20명 이상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고, 특히 고령자의 피해가 두드러졌다. 불길은 지리산 자락도 넘었으며, 천년고찰 보물 고운사가 소실되고 역사 마을인 하회마을 앞까지 위협했으며 약 1만4694헥타르의 산림이 소실되었다.
이는 축구장 2만여 개에 달하는 규모다. 정부도 이를 가리켜 '역대 최악의 산불'이라고 언급할 정도다. 그럼에도 초기 대응과 주민 대피 안내에는 혼선이 있었다. 화마가 번지는데 어느 방향으로 대피해야 안전한지 제때 알리지 못했고, 대피 명령 역시 오락가락하며 주민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재난문자 경보가 발령되었지만 고령층 등 취약 주민들은 문자만으로는 신속히 대응하기 어려웠고, 결국 많은 인명 피해로 이어졌다.
전기와 인터넷망, 그리고 휴대폰 통신망이 끊겼고 화마가 지나간 일대는 말 그대로 암흑천지가 되었다.
화재재난 현장에서는 공식적인 재난 정보 대신 '카더라 통신'이 난무했고, 주민들은 대피 경로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해야 했다.
결국 이번 참사는 기후 변화로 대형 산불 위험이 높아진 현실에서 정보 전달과 소통 부재가 재난을 얼마나 악화시키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실 예라고 할 수 있겠다.



▲ 재난 속 빛을 발하는 지역 공동체와 라디오의 힘

대형 재난 상황에서는 공동체의 조직력과 정보 공유가 생명을 지키는 열쇠가 된다. 특히 공동체 라디오방송은 지역 밀착형 매체로서 재난 전·중·후 모든 단계에 걸쳐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고 정서적 지지를 제공할 수 있는 소중한 소통 수단이다.
해외 사례를 보더라도, 일본 등에서 공동체 라디오가 지역의 재난방송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그 필요성이 충분히 입증되었다.
주변에서도 마을 방송과 자원봉사망이 위기 때 빛을 발해왔듯, 공동체 라디오는 이를 한 단계 발전시킨 현대적인 마을 방송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공동체 라디오가 재난의 각 단계에서 수행할 수 있는 핵심 역할들을 정리해 봤다.



1) 재난 발생 이전

지역주민 대상 재난 예방 교육과 기상 특보 전달로 위험을 미리 경고하고 대비를 도운다.
평소 마을 소식과 함께 산불 예방 수칙 이나 대피 요령을 방송해 주민들의 경각심을 높이고, 비상시 연락망을 구축하는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다.



2) 재난 발생 시

실시간으로 화재 진압 상황과 대피 안내를 방송하여 주민들이 혼란 속에서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돕는다.
예를 들어, 산불의 진행 방향과 안전한 대피로를 시시각각 전파하고, 마을별 대피소 위치나 집결 지점을 알려줄 수 있다.
또 휴대폰 통신망이 불통되거나 인터넷 접근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라디오는 배터리만 있으면 수신 가능해 가장 접근성 높은 정보 창구가 된다. 아나운서나 진행자가 지역 방언과 친숙한 말투로 전하는 방송은 주민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잘못된 소문이나 가짜뉴스를 바로잡아 혼선을 막는 정보교정자 역할도 수행한다.



3)재난 수습 및 이후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심리적인 위로와 연대감을 제공할 수 있다.
공동체 라디오는 주민들이 전화 연결 등을 통해 사연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는 창구가 될 수 있다.
또한 구호 물품 배부 일정, 이재민 지원 정책, 복구 작업 계획 등 복구 단계의 실용적인 정보를 상세히 전달하여 행정과 주민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나아가 지역 내 자원봉사자 모집이나 성금 모금 안내를 통해 공동체의 자발적 복구 노력을 이끌어내고, 시간이 지나 트라우마가 남은 이들을 위한 전문가 상담 안내 등 장기적인 치유 방송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
이처럼 공동체 라디오방송은 재난 대응의 모세혈관으로서, 큰 재난 틈새에서 세밀하고도 인간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전문적인 국가 재난방송이 거시적 정보를 준다면, 공동체 라디오는 마을 단위의 미시적이고 생활 밀착형 정보를 전하며 주민 곁을 지키는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 들려오는 이웃의 음성은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고 "우리 동네는 우리가 지킨다"는 공동체 의식을 불러일으켜 준다. 결국 지역 공동체의 강한 연결망과 공동체 미디어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재난도 슬기롭게 이겨낼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 남해FM, 가능성 증명하고도 외면받는 현실

남해군에는 다행히도 이러한 공동체 라디오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모범 사례가 있다. 바로 2022년 개국한 남해FM공동체라디오( FM 91.9MHz)이다.
남해FM은 경남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으로서, 설립 취지에 재난방송을 통해 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안전한 지역공동체 형성에 이바지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내세웠다.
실제로 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강타했을 때, 정식 개국도 하기 전에 남해FM의 자원봉사자들은 비상 생방송을 편성하여 태풍 정보와 대비 요령을 지역주민에게 알리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는 작은 지역 라디오라도 재난 상황에서 얼마든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지역 축제나 행사 소식은 물론 코로나19 방역, 기상이변 소식 등 지역 밀착 정보 제공을 통해 이미 남해FM은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미디어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남해FM을 향한 행정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남해군은 정책적 관심과 제도적 지원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으며, 방송통신위원회 등의 정부 재정 지원 역시 전무한 실정이다.
남해FM이 개국하기까지 지역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았고, 현재도 자원활동가들이 열정만으로 방송을 꾸려가고 있지만 정작 지속 가능한 운영을 뒷받침할 예산과 행정 지원은 전무한 상태다.
한 달 후원금이 몇 만 원에 불과한 때도 있었고, 장비 교체나 송출권 확대는 꿈꾸기 어려운 형편이다. "허가만 해놓고 예산은 0원"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올 정도로, 공동체 라디오는 벼랑 끝에서 자력으로 버티는 현실이다. 남해FM의 사례는 공동체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주민들의 희생적 노력으로 세운 소중한 방송 인프라가 지자체의 무관심 속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면, 재난 시국에 그것은 커다란 사회적 손실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남해FM은 하루 19시간씩 지역 소식을 전하며 '우리 남해의 방송'으로 기능하고 있지만, 정작 재난 대응의 공식 파트너로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인 것이다.



▲ 공동체 라디오를 공식 재난 대응 시스템에 포함시켜야

이제는 행정이 나서서 공동체 라디오를 적극 활성화 하고 공식적인 재난 대응 시스템의 일환으로 포함해야 할 때이다.
첫째, 지자체 차원에서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재정 지원과 전문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재난 대응은 공공의 책무인 만큼, 예산을 투입해 방송 장비를 보강하고 예비 전력을 확보하도록 돕는 것이 마땅하다.
공동체 라디오 운영자들과 자율방재단, 소방서, 군청 재난부서간에 상시 소통 채널을 구축해 평소에도 훈련과 정보 교류를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산불 조기경보가 발령되면 군청 재난담당자가 곧바로 남해FM에 내용을 통보하고, 라디오는 이를 해설과 함께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협력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또한 대피소 위치, 마을별 전파 상황 등을 행정기관과 사전에 공유 하여 유사시에 신속히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둘째, 법·제도적으로 공동체 라디오의 재난방송 역할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현재 재난 발생 시 정부는 주로 중앙매체와 문자 경보에 의존하지만, 앞으로는 지역공동체 미디어를 공식 경로로 인정하고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재난방송 주관 방송사 목록에 공동체 라디오를 포함하고, 재난 관련 긴급 속보를 공동체 라디오에도 동일하게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면 현장의 정보 전달 속도가 크게 향상될 것이다. 나아가 인근 지역 여러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광범위한 재난에도 서로 협력 방송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 지역 간 정보 격차도 줄일 수 있다.
이러한 정책적 뒷받침이 있어야만 공동체 라디오가 유사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동체 라디오를 더 이상 '취미 방송'이나 '부차적 홍보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그것은 재난 시 지역주민의 생명을 지키는 긴요한 기반 시설이며, 평소에는 풀뿌리 민주주의와 공동체 문화의 산실이 되는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행정과 지역사회가 손을 맞잡고 남해FM 같은 공동체 라디오를 키워갈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떤 재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전망을 갖추게 될 것이다.
잇따른 산불 대재앙이 남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재난에 강한 지역 사회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오늘 공동체 라디오에 대한 지원과 협력을 시작한다면 내일은 분명 더 많은 생명과 삶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목소리가 살아있을 때, 지역의 생명줄도 살아난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분명히 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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