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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기고] 남해 용문사 '수국사금패'의 비밀을 푸는 열쇠, 서포 김만중 선생이 쥐고 있다

2025. 08.08. 10:24:39

▲ (남해 용문사에 있는 인로왕보살 번)

▲ (남해 용문사에 있는 '수국사금패', 뒷면에'익릉관'과 '경릉관'이라고 적혀 있다.)
한국유배문화연구소장 박 성 재 [전 국사편친위원회 자료조사위원]

지난주 화요일 퇴근 무렵 전자우편이 한 통 왔다.
발신자는 자신을 경남 남해 용문사 신도라고 밝힌 박**라는 분이었다.
우연히 법보신문 연재 글 '기억해야 할 서울의 문화유산'에서 '황금사찰 수국사 상' 편을 읽고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요약하자면 "현재 남해 용문사에는 '수국사금패(守國寺禁牌)'라는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그것은 조선의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용문사를 수국사로 지정하고 내려준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왜 선조가 남해에 있는 용문사에 이런 귀중한 물건을 하사했는지 정확한 내력을 알고 싶다"라는 말씀이었다
'수국사금패'는 지름 14.5cm, 두께 1.5~2cm 정도 되는 원형 목패인데, 앞면에는 '수국사금패', 뒷면에는 '경릉관(敬陵官)'과 '익릉관(翼陵官)'이라고 쓰여 있고 각각 수결(서명)이 있다.
나는 오래전에 용문사에서 이 패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은평구 수국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자우편을 받고 나니 기고가로서 무언가 알아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과 함께, 재미없는 내 글을 읽어주신 분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곧 이 금패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1692) 선생이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포 김만중은 조선 시대의 위대한 문인이자 사상가였지만, 그가 살았던 17세기 후반은 조선 후기 붕당 정치가 가장 격화된 갈등의 시대였다.
그는 서인 계열에 속했으면서도 서인계 인물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기도 한 비당파적 인물이었다.
이 일로 38세인 1674년 정월에 강원도 금성(지금의 철원 인근)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51세인 1687년에는 장희빈 세력의 권력 장악을 비판하고 인현왕후 복위론에 동조한 일로 인하여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또 53세인 1689년에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사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일 때문에 남해로 유배되어 1692년 56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유배지였던 남해에서 약 3년간 머무르며 '구운몽'과 '서포만필' 등 주요 저작을 완성했다. 한글 소설로 유명한 '구운몽'은 주인공 성진이 꿈속에서 양소유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결국 모든 것이 한바탕 꿈이었음을 깨닫는 구조의 소설이다.
성진이 양소유로 환생해 다양한 삶을 경험한 뒤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구조는 불교의 윤회사상과도 연결되기에, 이 소설은 세상의 모든 영광과 고통, 욕망이 결국 덧없고 무상하다는 불교적 인생관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다.

김만중은 유학자였지만 이 작품에서는 유교의 효 사상과 불교의 업보·윤회·천도재 개념을 융합하여 종교 간 사상적 융합을 보여줬다.
다시 이야기를 '수국사금패'로 되돌려보자.
이 금패의 비밀을 풀려면 우선 뒷면에 쓰여 있는 '경릉관'과 '익릉관'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편에서 밝혔듯, 세조는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가 병으로 일찍 죽자 지금의 서오릉 가운데 첫 무덤인 경릉을 조성하고 그 동쪽에 정인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1680년 숙종은 정비인 인경왕후가 죽자 서오릉에 무덤을 쓰고 익릉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때 정인사를 익릉의 능침 사찰도 겸하게 하면서 사찰명을 수국사로 바꾸었다.

즉 '수국사금패' 뒷면의 경릉관과 익릉관은 이 금패가 경릉과 익릉을 관리하던 수국사 스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국, 이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익릉의 주인인 인경왕후가 서포 김만중의 조카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즉, 김만중의 형이 인경왕후의 아버지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경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자 김만중 역시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그가 관직에 복귀하거나 위기를 넘기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김만중이 사망했을 당시부터 용문사는 그의 장례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1692년 사망했을 때는 아직 죄인이었기에 어려웠겠지만, 그의 관직이 복권된 1698년 이후부터는 용문사에서 김만중의 영혼을 위한 영산재를 거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남해 용문사에는 이런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로왕보살번(引路王菩薩幡)이나 금강령, 바라, 연옥등, 촛대, 화병, 제기 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수석연구관 noalin@daum.net)[1786호 / 2025년 7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따라서 행정당국에서는 '남해 용문사와 김만중 그리고 수륙재를 '유배문화콘텐츠화' 하는 방안도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그 이유는 남해군 관광자원의 '대표스토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더 확장한다면, 이는 전국규모의 서포문화제를 개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해 용문사 소장된 수많은 문화재를 개방할 수 있는 공간, 즉 문화재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 행정당국과 남해군의회와 남해관광문화재단에서 주도적으로 나서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수국사금패'가 또 하나의 보물로 국가 지정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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