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작곡가이자 색소폰의 대가 이봉조 선생 고향은 창선면 수산리
이봉조 선생은 1931년 5월 1일, 남해군 창선면 수산리에서 태어났다. 호적상으로는 1932년 5월 1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생년월일은 1931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봉조 선생은 어린 시절 진주로 유학을 가셨다고 한다. 당시 진주는 경남의 중심 도시로 선생은 진주고등보통학교(현재의 진주중학교와 진주고등학교를 합친 것)에서 수학하셨다고 한다.
▲ 음악적 천재성을 보이다
이봉조 선생의 음악적 재능은 진주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빛을 발했다고 한다. 특히 학교 음악 선생님이셨던 이재호 선생께서 이봉조의 천부적인 음악 재능을 발견하고 색소폰을 소개해주셨다고 한다.
이후 진주농고(현 경상국립대) 재학 시절, 미군 부대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존 콜트레인과 소니 롤린스 같은 재즈 거장들의 음악을 듣고 감동을 받아 학교 밴드부에서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연습 소리 때문에 하숙집을 다섯 번이나 옮겨야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 두명의 스승에게 받은 음악적 영향
이봉조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두 분의 스승이 계셨다고 한다. 첫 번째는 진주고등보통학교의 음악 선생님이셨던 이재호 선생님이고, 두 번째는 1950년대 최고의 재즈 뮤지션이었던 엄토미 선생님이었다.
한국 재즈계의 거장 이봉조 선생의 음악적 뿌리가 이 분들을 통해 본격화 된 것이다. 스승인 이재호 선생님은 그의 재능을 최초로 발견하고 색소폰의 세계로 인도한 인물로 확인되었다.
이재호 선생님은 '한국 가요계의 슈베르트'로 불리던 진주 출신의 작곡가로, 진주고등보통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했다. 그는 학생이었던 이봉조의 천부적 음악 재능을 알아보고 학교 밴드부 입단을 권유, 색소폰과의 첫 만남을 주선했다.
지역 음악계 관계자는 "이재호의 가르침이 이봉조가 색소폰 연주자와 작곡가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그의 영향력은 이봉조 선생의 일생과 음악적 업적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남해에서 이봉조 선생을 재조명하는 일은 매우 뜻깊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내놓았다.
▲ 대학 시절과 미8군 활동
1952년, 이봉조는 한양공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 시절 동안 낮에는 수업을 듣고, 밤에는 미군 부대에서 공연을 하며 바쁘게 생활했다고 한다.
1954년부터는 미8군에서 재즈 색소폰을 연주하고 공연하기 시작하면서 이로 인해 2년간 휴학을 했으며, 1958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 초기 직업과 음악적 시작
대학 졸업 후, 이봉조 선생은 서울특별시청 토목과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2년간 근무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어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미8군 무대에서 재즈 테너 색소폰을 연주하며 엄토미 선생님의 제자로서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1961년, 이봉조는 과감히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전업 음악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후 김광수 악단에 정식으로 입단하여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는데, 1962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이봉조 악단을 결성, 미8군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했다고 한다.
▲ 국제적 뮤지션으로 활동
이봉조 선생은 1970년대에 여러 국제가요제에 참가하며 한국 음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주요 국제 활동으로는 1970년 11월 일본 동경 국제가요제에서 정훈희 씨가 부른 '안개'로 베스트 10에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1971년 그리스 아테네 국제가요제에서는 '님의 눈물'로 은상을, 1974년 칠레 비냐델마르 국제가요제에서는 '여러분'으로 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렇듯 국제 활동을 통해 이봉조는 한국 대중음악의 세계화에 큰 기여를 한 기념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가수 정훈희 씨가 제2회 이봉조 전국 가요제에서 이봉조 선생의 곡을 열창하고 있다. 정훈희 씨는 이봉조의 곡을 통해 여러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했다. 특히 '안개'는 정훈희가 두 번 만에 녹음을 끝내며 대중에게 전해진 곡으로 유명하다. |
▲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협업
이봉조의 곡을 부른 가수들을 살펴보면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현미, 정훈희, 최희준, 차중락, 윤복희, 김추자, 박경애, 최백호, 김세환, 심지어 개그맨 이주일의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까지 이봉조는 많은 스타 가수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기도 했다. 이 중에 현미와의 관계는 특별하기도 하다. 1957년 미8군 무대에서 칼춤 무용수로 활동하던 현미는 이봉조 덕분에 스타가 되었으며, 이봉조와의 관계는 1974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봉조는 TBC의 인기 프로그램 '쇼쇼쇼'를 10년간 이끌며 한국 대중음악계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국내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빛을 발했는데, 특히 정훈희 씨와 함께 여러 국제 가요제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정훈희는 이봉조의 곡을 통해 여러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며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안개'는 정훈희가 두 번 만에 녹음을 끝내며 대중에게 전해진 곡으로 유명하다. 이런 성과는 지금의 케이팝 열풍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정훈희 씨의 말씀처럼, "케이팝의 문은 이봉조 선생님이 여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2년은 이봉조 선생님에게 특별한 해로 기록된다. MBC 주최 '전국 경음악단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 'It's a Lonesome Old Town'의 번안곡 '밤안개'와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종점' 등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었다.
재즈적 요소를 도입해 재즈와 대중음악의 융합
세련된 멜로디와 편곡으로 대중음악의 수준 향상
국제음악제 참가 등 한국음악 세계에 알려…사실상 K-Pop 역사 시작
▲ 한국의 스탄 게츠 이봉조
이봉조는 세계적인 테너 색소포니스트 스탄 게츠와도 인연이 있었다. 70년대 초, 스탄 게츠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TV 쇼 프로그램에서 협연을 했는데, 이 일화는 지금도 음악계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 이봉조 선생의 대표작과 음악활동
이봉조의 대표작으로는 '밤안개'(1962년, 현미), '맨발의 청춘'(1964년, 윤형주), '안개'(1971년, 정훈희), '보고 싶은 얼굴'(1972년, 현미), '꽃밭에서'(1970년), '무인도'(1973년, 정훈희), '사랑의 종말'(1975년) 등이 있다.
이봉조는 작곡가로서 약 300여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또한 색소폰 연주자로서도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으며, 1964년에는 MBC TV 전국경음악경연대회에서 이봉조 악단이 대상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 영화 음악 감독과 연출가로도 활동
이봉조 선생은 영화 음악 분야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그는 1963년 영화 '가정교사'로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했으며, 1965년에는 영화 '광야의 호랑이'로 영화음악 연출가로, 1967년 영화 '안개'로 영화음악 연주감독으로도 데뷔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영화 '맨발의 청춘'으로 청룡영화상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재즈와 대중음악의 융합
이봉조는 재즈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대중음악을 선보였는데 당시 트로트가 주류였던 가요계에 재즈와 팝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대중음악의 장르를 확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로서 색소폰 연주곡 CCM 가스펠 음반도 다수 출판했다고 한다.
▲ 한국 대중음악계의 거장 이봉조 선생
이봉조의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한국 대중음악의 고급화와 세계화에 기여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봉조는 작곡가, 연주자, 편곡자, 영화음악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신 음악계의 거장이셨다. 그의 음악적 재능과 열정은 한국 대중음악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선생이 남긴 한국 대중음악의 변화를 살펴보면, 트로트 일색이던 가요계에 재즈적 요소를 도입하여 재즈와 대중음악의 융합을 꾀했고, 세련된 멜로디와 편곡으로 대중음악의 수준을 높였으며, 국제 음악제 참가 등을 통해 한국 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한국 음악의 세계화를 선도하였다. 이때부터 사실상 K-Pop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그의 음악적 유산은 지금의 케이팝 열풍으로 이어져, 전 세계 음악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 이봉조 선생의 음악세계 계승 발전을 위해
이봉조 선생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높지만 아직까지 이렇다할 기념사업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나라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거장을 배출한 남해에서 그의 음악적 유산을 깊이 연구하고 계승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아가 선생의 음악 기법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그의 철학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연구되었으면 한다. 이봉조 음악관 또한 이런 이유로 조성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봉조 선생과 관련 음악축제 또한 고려해 봐야 한다. 대중들과 함께 하며 선생의 음악 철학과 기법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 또한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아가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 그의 음악과 관련 자료들을 디지털화하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