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라는 사회에 섞여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일들로 힘들어하고 부대끼는 모습을 본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남해라는 공동체 속에서 아직도 정(情)과 의리(義理)를 믿고 살아보려는 사람들은 정치적 논리나 정치적 성향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사람 자체나 남해라는 공동체 자체를 자주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남해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남해라는 공동체의 방향은 무엇인지 술안주로 삼는다. 답도 없는 이야기가 돌고 돌다 보면 한숨짓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들이 무척이나 무거워 보인다. 그럴 때마다 우리 사회에 마을이나 지역에서 명망있고 영향력을 가진 사람, 과거 흔한 단어였던 유지(有志)라는 분들께 질문을 던지고 싶지만 세대를 통틀어 유지(有志)가 누구인지 필자에게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한 친구는 생활의 방편으로 또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향 남해에 발 디디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게 진정으로 남해사회를 사랑하고 고민하는 누군가가 많다고 한다. 한 친구는 남해사회에 유지문화가 없어진지 오래고 모두들 자신의 이익이나 자신의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남해를 이야기하고 술안주로 삼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
국어사전에는 유지(有志)를 마을이나 지역에서 명망있고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 명망(名望)은 명성(名聲)과 인망(人望)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도 규정해 놓았다.
이들 정의 속에 공통적인 요소는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필자가 아는 분은 자신의 고향에는 지금도 유지가 관공서에 버티고 서면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어른이기에 함께 관공서 마당에 버티고 서는 문화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자랑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어른이기에' 무조건 어른의 행동이 80% 이상 옳다고 인정하고 따라주는 것이라고 한다.
각박한 세상에 무슨 때늦은 유지(有志) 타령이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겠다.
그렇지만 세상이 삭막해지고 어려울수록 누군가에게 단지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필자가 만난 20대, 30대, 40대, 50대들은 남해말로 '행님'이라는 그런 분이 있길 바랬다. 그 분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진정으로 남해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남해를 걱정하고 아파하는 그런 분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