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선 후기 사상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은 이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삶과 글은 시대를 꿰뚫는 문제의식과 해법을 집요하게 탐색한 여정이었다. 문벌과 관습이 굳건하던 18세기 조선 사회에서, 그는 통념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며 변화의 실마리를 모색했다. 오늘날 교육이 강조하는 '비판적 사고력', '융합적 사고', '현장 중심의 학습'은 이미 230여 년 전 그가 몸소 실천한 삶의 방식이었다.
연암은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삶은 그를 권세(權勢)와 부(富)의 궤도에 쉽게 올려놓지 않았다. 젊은 시절 아버지의 별세와 집안의 몰락은 생계를 위협했고, 당대 양반 지식인의 전형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는 절망 대신 사유를 선택했다. 궁핍 속에서도 독서를 멈추지 않았고, 현실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조선의 경직된 신분 질서, 형식만을 중시한 학문, 비생산적인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대해 그는 거듭 의문을 던졌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1780년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에 박지원이 자비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하면서 구체적인 형상을 갖게 된다. 정사(正使)였던 8촌 형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열하(熱河)를 방문한 그는, 그 여정에서의 체험을 「열하일기(熱河日記)」에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 사절의 기행문이 아니다. 그는 청(淸)의 정치, 경제, 문화, 도시 풍경, 백성의 삶을 입체적으로 관찰하며 조선 사회와 철저히 대비했다. 북경시장의 활기찬 상업 활동을 보며 조선의 폐쇄적 경제를 성찰했고, 실용 기술과 출판문화에 감탄하며 지식의 개방을 갈망했다. 열하(熱河) 지방으로의 여행은 연암(燕巖)의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고 확장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그의 현실 개혁 사상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생생한 묘사와 풍자를 통해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추었다. 연암은 현실과 유리된 유교적 관념을 비판하며, 사회와 백성의 실제를 중심에 두는 현실적 인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성리학 중심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농업·상업·기술·교통 등 실질적 사안에 주목했고, '기예(技藝)를 천시하고 말재주로 벼슬에 오르는' 구조 아래 기술자와 상인을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재조명했다. 그의 글에는 시대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보수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열하일기」는 생전(生前)에 출간되지 못했고(1932년 연암집으로 활자화됨),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필사본으로만 전해졌다. 특히 청 문물에 대한 긍정적 서술은 '오랑캐를 숭상한다'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연암은 벼슬길에서도 반복된 좌천과 정적들의 시기 속에 자리 잡기 어려웠으며, 말년에는 병환과 가족사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그는 학문을 '현실을 밝히는 등불'로 삼았다. 연암은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고, 그의 사유는 단절이 아닌 연속의 흐름 위에 놓여 있었다. 그의 지향은 정약용(丁若鏞),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등과 함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전통을 형성하며, 근대 계몽사상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교육(敎育)이 직면한 과제 역시 연암(燕巖)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는 낯선 세계를 거울삼아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았고, 지식을 삶 속에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오늘의 교육은 여전히 시험과 평가 중심의 지식 축적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연암은 이미 지식(知識)이란 문제 해결의 수단이며, 민생(民生)과 단절된 이념은 공허할 뿐임을 간파했다. 그에게 교육은 곧 세상을 이해하고 바꾸는 힘이었다. 배움이 삶과 연결될 때, 교육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 학교 교육은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하며, 협업 속에서 삶과 연결된 배움을 강조하고 있다. 'PBL(문제 기반 학습), STEAM 교육(과학·기술·공학·예술·수학 융합), 고교학점제, 교육과정 자율화'와 같은 흐름은 연암(燕巖)의 학문 태도와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제도만으로 그의 정신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 없이 묻는 자세와 기존 질서에 대한 성찰,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용기다. 연암의 학문은 권위에 안주하지 않았고,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오늘의 교육도 형식에 그치지 않고, 학생 스스로 사고(思考)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역량(力量)을 기를 때 살아 있는 배움이 가능하다.
연암은 "산천을 두루 다니며 마음을 넓히고 이치를 구한다"라는 신념으로 여행했고, 삶의 현장에서 글을 남겼다. 이는 교실을 넘어, 삶을 배움의 장으로 삼으려는 오늘날 교육 철학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그의 섬세한 관찰력, 깊은 성찰, 그리고 치열한 글쓰기를 다시금 떠올려야 한다. 그는 단지 조선 후기의 문인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교육의 본질을 이미 230여 년 전에 사유한 '질문의 철학자'였다. 우리는 지식인을 종종 정답을 아는 사람이라 여기지만, 연암은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식이 아닌 질문을 통해 미래를 구상했다. 그의 질문은 현상을 넘어 본질을 겨냥했고, 당대의 통념을 넘어,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연암(燕巖)처럼 질문하고 있는가? 이 물음 앞에서 우리는 교육을 다시 정의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질문했고, 이제 우리는 그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그래야 교육이 살아난다. 질문은 사유를 촉발하고, 사유는 변화를 이끈다. 연암의 물음은 단순한 시대 비판이 아니라 인간, 사회, 그리고 배움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었다. 오늘날의 교육도 그 물음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질문 없는 교육은 생명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연암의 질문이 지금, 이 순간 우리 교실에서 다시 울려 퍼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