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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미상) 선생은 우리나라 고대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천재형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다섯 살에 글을 짓기 시작했고, 12세에 당(唐)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살에 당나라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 황소의 난(黃巢之亂)이라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문학과 사상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인물로 손꼽힌다. 문창후(文昌侯)로 추존된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始祖)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위대한 인물이 고국 신라(新羅)로 돌아온 이후 겪게 된 현실은 허무에 가까웠다. 당시 신라 사회는 문벌 귀족 중심의 경직된 체제였으며, 그의 뛰어난 재능과 개혁적 식견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그가 남긴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사산비명(四山碑銘)」은 당대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뛰어난 문장력과 사상적 깊이를 보여주었으나, 신라 조정은 이를 제도 개혁으로 연결 짓지 못했다. 결국 역사는 그를 '불우한 천재'로 기억하게 했다.
오늘날 우리는 최치원을 단지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로만 기억할 것인가? 혹은 그를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박제(剝製)된 역사적인 인물로만 추켜세우는 데 그쳐야 할까? 그의 삶과 사유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조기교육, 인재 양성, 교육의 사회적 책임 아래 반복되는 '성과 중심주의와 획일화된 교육 관행'을 돌아보게 만든다.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留學)을 떠난 그의 경험은 단순한 '신동 전설'이 아니다. 이는 동아시아 문명권 속에서 조기 유학을 통해 문명을 내면화한 한 소년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국경을 넘어선 교육의 가능성(可能性)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다. 다문화(多文化) 환경에서 경쟁과 협력, 지식과 실천을 넘나들며 성장한 그의 경험은 오늘날 세계 시민교육이나 글로벌 리터러시(global literacy, 문해력) 담론과도 맞닿아 있다. 이는 청소년들이 직면한 복합적 정체성과 문화 간 소통 역량을 어떻게 함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신라 사회는 그의 귀국을 온전히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신라의 정치·사회 구조는 천재 한 사람의 식견과 개혁 의지를 담아낼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결국 최치원(崔致遠)은 관직에서 밀려나 은둔의 삶을 살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단순히 "신라가 인재를 몰라봤다"라고 탄식하기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어떤 교육을 통해 어떤 시스템으로 인재를 길러내고 이들이 사회에서 기능하게 만드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의 좌절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시대와 제도가 인재를 담아낼 그릇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과연 다양한 재능을 이해하고 발현시킬 수 있는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사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가? 인재는 단지 '선발'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성장하고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함께 길러가야 할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된다. 개인의 잠재력을 꽃피우는 환경은 곧 사회 전체의 발전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교육과 제도의 방향을 다시 성찰해야 할 시점이다.
오늘날 교육에서도 '최치원 같은 인재'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조기유학, 국제학교, 영재교육 등은 그 가능성을 넓히고 있으나, 이들을 길러낸 사회가 이들을 제도 속에서 수용하고 성장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개인의 성취가 집단의 발전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교육의 방향성과 사회 구조가 맞물려야 한다. 인재는 출발점일 뿐, 그 역량이 온전히 꽃피우고 지속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생태계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최치원의 삶은 오늘날 '전문성'과 '공공성'의 균형에 대해 다시금 깊이 고민하게 한다. 그는 단순한 유학생이 아니라, 혼란한 시대에 바른 목소리를 낸 사상가였다. 불교, 도교, 유교를 아우르는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풍류(風流)'라는 독창적인 사유 체계를 구축하고, 사회 개혁을 위한 정책까지 제안했다. 이는 오늘날 교육이 단순한 성적 향상을 넘어, '문제 해결 능력과 공동체적 감수성'을 함께 키워야 함을 시사한다.
더 주목할 점은, 최치원이 끝내 외면당한 이유가 단지 정치권력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도는 법령과 조직만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의 인식과 문화가 함께 변해야 인재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교육의 과제뿐만 아니라, 인재를 알아보고 인정하며 활용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적 수용력, 곧 문화적 기반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최치원의 삶을 되돌아보면 오늘날 교육은 단순한 학력 경쟁을 넘어,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깨닫게 된다.
비록 그의 말년은 험난했으나, 그가 남긴 유산은 비극에 머물지 않았다. '고운(孤雲)', 즉 '홀로 떠다니는 구름'이라는 그의 호(號)처럼 그는 자신이 속한 문명과 문화에 깊은 애정과 책임감을 지닌 지식인이었다. 천 년이 더 흐른 오늘, 우리는 그를 다시 떠올리며 교육이 지향할 인간상과 인재를 품을 수 있는 사회 구조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최치원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길러내고자 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살아갈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교육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살아갈 준비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다. 최치원은 유학(儒學)의 깊이를 품었지만,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이상과 실천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오늘날 교육 역시 그러해야 한다. 단순한 지식 축적을 넘어, 스스로 사고하고 조화를 이루며 공동체를 이끌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진정한 목표다. 그러므로 교육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가치와 덕목을 가르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최치원이 남긴 질문에 대한 오늘의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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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현들의 삶에서 배우는
최성기 선생의 교육이야기

